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키릴 문자 (문단 편집) === 9세기, [[글라골 문자]]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3.bp.blogspot.com/s1441008.jpg|width=100%]]}}}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glagolitic.gif|width=100%]]}}} || 9세기 당시 [[동로마 제국]]의 선교사인 [[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]] 형제가 [[슬라브족]]에게 [[기독교]]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. 이 가운데 키릴로스의 이름을 따와서 키릴 문자(Кѷрїлловица)라는 명칭이 유래됐다. 당시 그들은 슬라브 국가인 [[대 모라비아]]에 파견되었는데, [[파찰음]]이 많은 [[교회 슬라브어]]를 기록하기 위해 당시 그리스에서 널리 쓰이던 둥근 서체(Στρογγυλόσχημη γραφή, Uncial script)의 그리스 문자와 라틴 문자를 변형시켜 글라골 문자를 만들었다. 초기 키릴 문자를 보면 언셜체로도 불리는 둥근 서체와 유사함이 잘 보인다. 해당 글자는 교회 슬라브어를 표기하는 글자로 지정되어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대 모라비아에 파견된 863년부터 메토디오스가 선종한 885년까지 사용되었다. 서방교회, 특히 독일교회의 견제로 글자의 본격적인 전파에서 큰 성과는 없었고[* 그 와중에 [[독일인]] [[수도자]]들에게 메토디오스가 감금된 적도 있다.], 메토디오스 사후 서방교회가 본격적으로 모라비아를 관할하게 되면서 글자의 사용이 중지되고 라틴 문자로 대체된다. 이렇게 문자와 기독교를 슬라브족에 전파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[[정교회]]에서 거의 사도들 다음가는 높은 레벨로 통한다. 두 사람은 [[동서 대분열]] 이전[* 하지만 동서 교회간 세력권 다툼이 본격적으로 과열되기 시작한 시기였다. 메토디오스 사후 대 모라비아는 서방교회 관할권에 완전히 편입되어 두 형제와 함께 모라비아 사역에 참여한 동방교회 소속 [[수도자]]들은 서방교회의 견제를 이기지 못하고 일제히 추방당한다.]에 살았기 때문에 19세기에 [[가톨릭]]에서도 뒤늦게 [[성인(기독교)|성인]]으로 [[시성]]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